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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먹어 두는 편이 좋아. 어제 저녁부터 먹은 것이 없잖아."





"싫어. 지금은 속이 거북해."




"뭐든지 먹어 두는 편이 좋아. 어제 저녁부터 먹은 것이 없잖아."




류신이 오렌지 주스 팩을 뺨에 대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제야 유채는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봐. 열까지 나잖아. 이제 일본에 적군파는 없으니 공중 납치를 당할 일은 없다. 

안심해. 뭘 좀 시켜 줄까? 가벼운 샌드위치 같은 건 어때?"




"됐어. 먹고 싶지 않아."



"그럼 우유는? 아까 보니까 우유가 있던데. 차가운 우유가 싫다면, 데워서 가지고 오라고 하지."



"류신! 부탁이니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당신까지 움직이니까 머리가 어지럽잖아."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뺨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류신의 침묵이 신경에 거슬렸다.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쏘아준 것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처음 나리타 공항을 만들 때, 주민들의 시위는 말로 못할 만큼 격렬했다. 

개항 예정일에 과격파들이 관제탑에 난입해서 관제 기기를 파괴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개항식 때 운수성 장관이 난산 끝에 태어난 아기가 탈 없이 자란다는 말을 인용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의 말이 예언이 된 셈이지. 

하루 평균 350여 회나 항공기가 발착하고 승객 처리 능력은 67,500명이나 되는 공항이라면, 

아주 잘 돌아가고 있는 거겠지. 한국의 인천 국제 공항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중심 공항이라고나 할까?"




"흠."



"우유?"



"아니, 오렌지 주스."



"차가운 거?"



"응. 냉장고 안에 있는 걸로 새로 꺼내서 줘."




류신의 구애는……. 포기를 모르는 그의 구애는 너무나 애틋하기에 모르는 척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뿌리쳐도 내미는 손.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새로 꺼낸 류신은 유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응?"




"원래 야쿠자들의 거짓말은 하늘도 속는 법이다. 

네가 거짓말을 못하겠다면, 내가 구구절절 늘어놓을 테니까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알고 있었던 걸까? 사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보다도 가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가족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가장 적절한 해결 방법처럼 느껴졌던 기억상실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배배 꼬인 뻔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특히 준호의 문제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첩첩산중이었다. 



"당신이야 사기와 협박이 전공이니까 능수 능란하겠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내가 모두 하겠다는 거다."




준호는? 준호는 어떻게 할 거지? 순간적으로 준호의 이름이 밖으로 튀어나갈 뻔했으나, 다행히 혀끝에 걸렸다. 

지금은 유유자적하게 여행을 즐기려는 듯이 보이는 류신이지만 

준호의 이름을 듣는다면 싸늘하게 변해서 으르렁거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준호의 이름을 언제까지 묻어둘 수는 없다.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동안 생명의 은인인 류신과 깊은 관계가 되었다고 하면 

굳이 유채 앞에서 준호를 끄집어낼 사람은 없겠지만. 

유채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반드시 준호에게로 건너갈 것이다. 

그 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류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준호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면? 

기억을 잃고 길거리를 헤매는 유채를 구해준 청년 실업가가 

사실은 하나조의 오야붕인 스즈키 류신이라는 것을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제이드와 유채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준호가 알게 된다면? 





"걱정하지 마. 내가 모두 알아서 할 테니까. 

협박과 사기에 능통한 스즈키 류신이 아마추어 같은 실수라도 할 것 같나? 

나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을 잃고 길거리를 헤매는 너를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고 하면 모두가 쉽게 받아들일 테니, 나를 믿어."





"당신을 믿으라고? 차라리 오케다조 녀석들을 믿겠어."



"그럼 내가 에모토 마사노부가 되어야 하나? 그놈은 개구리처럼 생겨서 싫은데."




류신은 천천히 유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 비록 이 입으로 내뱉은 말은 모두 거짓일지라도 그녀를 애무하는 입술은 눈물이 날 만큼 황홀했다. 

뺨을 어루만지던 류신은 유채를 꼭 껴안았다. 유채가 손을 뻗자 문드러진 지문을 보게 된 류신의 눈이 어두워졌다.




"아팠지?"



아팠냐고? 사실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육체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을 이길 수 없다. 

그 뒤로 류신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질 때면, 미안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했다. 

후회할 바에야 그런 짓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았냐며 쏘아 주고 싶지만, 

지금처럼 젖은 눈의 류신을 마주하면 차마 그 말만은 뱉을 수가 없었다. 





"아팠어. 너무 아파서 지금까지도 온몸이 저릿저릿해.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좋다. 내 생명을 끝낼 때는 너에게 맡기기로 하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당신 생명은 어차피 내 거야."





유채의 말에 류신은 살짝 웃으면서 뺨을 쓰다듬었다. 

류신에게 어깨를 기댄 유채는 멍하니 비행기들을 쳐다보았다. 



"류신. 나, 정말 멋지게 거짓말을 할 거야. 

당신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사고로 눈을 다쳐서 빛에 약하다는 거짓말도 아주 잘할 거야. 

정말, 정말 거짓말도 잘하고 연기도 잘할 거야."





"그래."






"가족에게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방해하지 마. 알았어?"




"알겠다."



류신이 뒤에서 껴안았다. 넓은 가슴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따뜻한 가슴. 유채는 류신의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쿠자들이란 거짓말로 먹고사는 놈들이다. 

설마하니 하나조의 주인인 내가 그런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할 것 같아? 

가족들은 앞으로 평생토록 내가 뒤에서 돌봐줄 테니, 걱정할 것은 없다. 나를 믿어."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함께 불안감이 사라져갔다. 

류신의 단단한 팔이 주는 안락함.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등을 돌려도 이 팔만은 변함없을 것이다. 




"조심해욧!"



히로미가 미처 붉은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준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운전 하나 제대로 못해요? 사고라도 나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걸 몰라요?"